Struggled  for  labor  reforms,  human  rights  and  other  progressive  causes

To retrace Byeong Jin & Gyeong Seok's voyage of labor movement in the 1980s and 1990s

-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1978

-       8 :  YH무역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다. 이는 곧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다.

-       10 : 부마민중항쟁. 1979 10 16부터 10 20까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마산시( 창원시)에서 일어난 유신독재 저항시위를 말한다.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10 18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20일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진압을 했는데 1563명이 연행되어 87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20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국정부와 경찰은 공식적인 사망자가 없다고 발표해왔으나 32년이 지난 2011, 당시 마산에서 사망자가 있었음이 '부마민주항쟁 특별법제정을 위한 경남연대에 의해 확인되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현지를 시찰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린 결론)

1979

-      1026사태. 중앙정보부장(KCIA Director) 김형욱이 대통령 박정희를 사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1963-1979)의 몰락

-      2차 석유파동으로 정치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한편, 12.12쿠테타등에 의한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장악이 진행되다.

(1973년의 제l차 석유파동의 결과 OPEC '석유메이저'가 독점하고 있던 원유가격의 결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인플레이션과 달러 가치의 하락을 고려한 실질원유가격으로 끌어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1978 12 OPEC 회의는 1976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의 인상을 결정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2월 말 이란은 국내의 정치 및 경제적인 혼란을 이유로 인하여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시키고 수출을 중단하였다. 이 결과 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배럴당 10달러선을 조금 넘어섰던 원유가격은 불과 6년 사이 20달러선을 돌파하였고, 현물시장에서는 배럴당 40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1980

-      대학생들의 학원 민주화, 병영집체훈련제도의 폐지, 계엄령 즉각 해제, 언론자유 보장, 양심수 석방 등 정치적 요구를 내건 대규모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노조결성,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 어용간부 퇴진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쟁의가 급속하게 격화되다 (사북 동원탄좌,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의 노동자들은 지역점거, 경찰력과의 직접적인 대결, 공장파괴와 방화 등 70년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      5 15. 서울에서 10여만 명의 대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지방에 있는 26개 대학이 가두투쟁을 벌이고, 신군부는 군부대를 서울 시내로 이동시키다.

-      5 17, 신군부에 의해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1천여 명의 공수여단이 대학에 주둔하면서 대학가를 장악하다.

-      5 18, 광주민중항쟁 시작되다. 광주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등교하던 학생들을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난타하였고 이에 분개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광주 전남도청 앞에 모여 “휴교령을 철회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 신군부는 곧바로 7공수여단을 광주시내 한복판에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시작하였고,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면서 광주시민들이 무장하여 계엄군과 시민간의 전투가 5 26일까지 이어짐. . 27일 새벽 3 30, 2만여 명의 군인들에 의한 광주도청진압작전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다. 이 후 신군부의 사회 각 부문에 걸친 정화와 숙청작업이 진행되다.

-      8 275공화국 출범. 신군부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전두환 계엄사령관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은 지배체제 구축과 함께 신군부는 경제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친 중화학분야 투자를 조정과 자본자유화, 해외시장 개방을 단행하고, 노동조합 정화조치와 노동관계법 개정을 통하여 노동통제를 강화하다.

1970 년대 연평균 10%대의 고도성장과 호황을 구가하던 한국경제는 1979년에 엄습한 제2차 석유파동을 고비로 79년에 경제성장률은6.4%, 80년에는 -4.8%, 도매물가는39.0%나 상승하다. 공장가동률은 1979년의 82%에서 74%로 떨어졌고 그에 따라 휴폐업과 대량해고사태가 빈번해지면서 완전실업률을 공식통계 만으로도 1979년의 3.8%에서 5.2%로 급상승하였다(장명국, 1985:136)  이같은 경제위기의 진원지는 중화학 공업화이었다. 원자재 값이 폭등하고 국제적인 보호무역정책이 등장하자 취약한 중화학공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과잉 ․ 중복투자로 인한 자금압박과 외국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부담까지 겹쳐 사태는 더욱 악화하였다. 이로부터 해외 채무상환 불능은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하였고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끌어오는 방향으로 치달았다. 이로부터 80년 이후 외채총액은 1979 203억 달러, 1980 272, 1982 371억 달러로 매년 급증하였고 1985년에는 468억 달러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1986년에는 445억 달러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세계 4위의 거대채무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 에 대해 신군부정권이 취한 방법은 외국자본의 적극적인 도입과 ‘경제안정화정책‘이었다. 그 내용은 재정․금융긴축과 중화학공업의 중복투자의 해소 및 부실기업 정리 등이었다. 이 러한 구조조정과정에서 환율조정과 노동통제의 강화, 농업경제구조의 조정을 강행하였다. 환율조정은 1980 36.2%나 상승한 것을 시작으로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정권은 1980년 말 노동법을 전면 개정하여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고 임금억제정책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제조업 10인 이상 사업체의 주당 노동시간은 1980년 이후 83년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났으며 실질임금도 82년까지 절대적으로 감소하였을 뿐 아니라 80년대 전 기간을 통하여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밑돌고 있었다. 농업경제의 구조조정은 농산물 가격통제와 복합영농정책, 시장개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권은 1970년대 후반 유신정권이 농산물 가격파동을 계기로 도입한 농산물 수입에 의한 비축제를 계속 유지시켰다. 이에 따라 농수산물의 수입액은 1976 12 9백만 달러에서 1981 31 64백만 달러로 급증하였고 88년에는 43 2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에 더하여 주요 농수축산물에 대한 수입자유화 조치를 취하였다. 농가경제의 피폐화는 경제안정화를 명분으로 시행된 저미가정책과 그에 이은 복합영농정책에 의해 가중되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대량으로 농촌을 떠나 다시 도시로 찾아들었고 이들은 상대적 과잉인구를 형성하여 저임금 장시간 노동자로 영입되었다.

 

신군부는 1980 12 31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을 개정하고 <노사협의회법>을 새로이 제정, 공포하였다. 노동조합법은 노조결성에서부터 조직형태, 조직운영, 단체교섭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개정되었는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 째, 개정법은 기업별 노동조합만을 인정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산업별 지역별 단결과 연대를 차단하였다. 이에 따라 상급조직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노동조합은 기업별로 고립 분산되었다.. 더욱이 개정법은 제3자 개입을 금지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와 지원을 봉쇄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은 고립 무원한 상태로 기업 내에 남아 무력화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특히 중소 영세기업의 노조는 조직 활동과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진 나머지 끝내는 조직의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되었다.

 

둘째, 노조설립요건을 종업원 30인 이상 또는 1/5이상이 가입한 경우로 한정함으로써 새로운 노동조합 결성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셋 째, 70년대 국가보위법 아래 단체교섭의 경험을 갖지 못한 기업별노조에 있어서, 단체교섭권의 위임금지, 3자 개입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연장은 사실상 단체교섭을 포기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더욱이 장기간에 걸친 냉각기간을 설정함으로써 노동조합은 쟁의를 통해 요구조건을 관철하기 어렵게 되었다.

 

넷 째, 개정법은 노동조합의 조직력 강화와 자율적 운영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최대한 국가권력의 노동조합운영에 대한 지배 개입을 가일층 확대 강화하였다. 새 법은 행정관청에게 노조 해산을 명하거나 임원의 개선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과 노조의 결의 또는 단체협약 조항을 취소 변경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노조 설립신고를  취소 또는 반려할 수 있는 권능을 허용하였다. 나아가 새 법은 노조간부의 경력을 제한하고 조합비 사용을 규제하고 있었다.

 

다 섯째, 새로운 <노동쟁의조정법>에 따라 공익사업의 경우 그 범위를 은행 및 증권사업까지 넓혔을 뿐 아니라 직권중재를 받도록 하였고 일반사업의 경우에도 냉각기간을 대폭 늘리고 행정관청의 판단에 따라 언제든지 직권중재에 회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노동쟁의는 사실상 전면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이 처럼 국가권력은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규제를 확대 강화하는 대신 <노사협의회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노사협의회법>은 종래 노동조합법의 한개 조문으로 규정되어 있던 노사협의회를 제도화하기 위해 하나의 독립 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법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상호 협조하여 근로자의 복지증진과 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00인 이상 사업장에 의무적으로 노사협의회를 구성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기능으로는 보고사항과 협의사항으로 나누었는데 보고사항은 경영방침 및 실적, 분기별 생산계획과 실적, 인력계획 등이고 협의사항은 생산성향상 및 근로자의 복지증진, 근로자의 교육훈련, 노사분규예방, 고충처리, 안전 보건 기타 작업환경 개선 등을 규정하였다. 노사협의회는 분배할 빵의 생산문제를 다루는 노사간의 협력 장소로서 ‘노사공동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구로 설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이 규제되고 단체교섭과 노동쟁의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조건하에서 노사협의회는 단체교섭을 불필요한 것으로 왜소화시키고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협조를 강제하는 노무관리의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      또한 실질임금을 동결하고 농산물가격을 통제하여 경제난이 심화하다. 대학생들의 시위투쟁은 전두환정권 퇴진만이 아니라 반미투쟁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대중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을 통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학생들은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985

-      2 7 <인천지역노동자복지협의회(인노협)>* 창립

-      1980년대에 들어와 해고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 철폐 요구 싸움, 인천 대우자동차 파업(1985.4), 서울 구로공단의 10개 노조, 2500여명의 구로연대파업투쟁 (1985.5), 한국노총을 점거 농성하고 70명이 해고당한 대한마이크로전자(1985.9), 이전 대책을 요구하며 농성한 대림자동차(1985. 10), 4공단 상임이사실을 점거 농성하고 2명이 구속된 '동보전기 파업(1985. 10)'* 등이 있었다.

-      농민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 투쟁도 격화

-      5월 학원안정법 제정

-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

 

-      광주민중항쟁 뒤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많이 들어갔는데, 인천은 그런 노동자가 1천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이들과 기존의 노조 활동가들이 결합해 인천의 노동운동은 강한 조직력을 갖추었다. 1986년 인천지역 기관장 회의자료에 따르면 신원을 확인한 인천지역 ‘위장취업자’만도 246명으로 서울 181, 경기 178, 부산 40, 광주 20, 대구15명에 비해 훨씬 많았다.

 

1986

 

-      2 7 <인천지역 노동자연맹(인노련)>* 창립. 인천노협의 공개적인 활동, 즉 노조결성, 사내 투쟁 지원이나 노동법 상담 등만으로는 사업장에서의 탄압과 구속, 블랙리스트에 의한 대량해고로 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비공개 조직으로 전환하다.

 

-      인노련의 조직은 공개조직, 해고자투쟁위원회, 현장조직의 3개 틀로 구성했다. 공개조직인 인노련은 위원장과 조직 홍보 등 실무부서로 구성했다. 대표는 대외적으로 공개했다. 비공개 지도부인 ‘안개’라고 부른 일종의 전위조직이 조직 지도를 담당했다. 현장조직은 주안, 부평, 하인천 3개 지구다. 해고자투쟁위원회(해투위)*는 사업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로 구성해 해고자의 복직 뿐만 아니라 합동생활을 하며 언제라도 사업장 투쟁 지원과 시위에 나갈 수 있도록 대비한 상시 투쟁체였다. 해투위는 4~6명이 조를 이룬 8개조로 구성했다.

-      인노련은 86년 봄부터 가두시위에 나선다. 이렇게 시작된해방 이후 최초의 노동자들의 비합법적 정치투쟁은 이해 5.3 인천항쟁까지 이어진다.

-      1986년 초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의 고문사실이 폭로되다.

-      3 11, 군사독재 퇴진과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투쟁이 야당인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서울지부 결성을 시발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수십만의 군중이 모여들다.

 

-      인천 5.3 사태

53시위 참가자는 모두 5만명이었다. 이 숫자는 인천에 앞서 3 23일 개헌추진지부 현판식을 가진 부산의 20만명, 광주의 35만명 그리고 5 10일 마산의 20만명에 비해 적은 수였다. 광주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향한 열기가 아주 높아 대회가 끝난 뒤에도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고 32명이 구속됐다. 마산에서는 연행자 42(노동자 7) 가운데 9명을 구속했다. 인천대회는 수도권에서 처음 갖은 집회이며 대규모 공장이 밀집한 지역이어 이후 민주화운동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고비였다. 그런데도 5만명에 그친 것은 53현판식 직전인 4 28일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가 반미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고 5 1일 인천의 삼한택시 노동자 변형진이 분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53대회가 단순한 개헌 현판식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학생의 반신민당 기류가 강할 것이라고 판단한 신민당이 당원 동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노동자들의 선전물과 구호를 분석해보면, 첫째 민주주의에 관한 요구는 군사독재 타도, 직선제 개헌 그리고 언론,출판, 집회, 단결, 파업의 자유 등이었다. 독재의 내각제 개헌을 통한 영구집권을 경계하는 구호도 나왔다.

 

둘째, 생활임금 쟁취, 최저생계비, 8시간 노동제, 산업재해 대책, 파업․시위의 자유, 단결권 보장과 같이 노동자의 생활과 권익 보장에 관한 요구가 나왔다. 그리고 민중생존권 보장, 삼민헌법 쟁취처럼 민중의 진보정치를 주장하는 내용도 나왔다.

 

셋째, 미․일외세와 자본 그리고 미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 자주의 주장이었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게 개방을 요구했고, 이원집정제나 내각제를 요구한 것을 반대하는 지적이다. 이런 내용은 신군부의 광주민중 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생긴 변화이었다. 이와 관련한 구호는 “노동자 피땀 짜는 미제국주의자 몰아내자!” “반미 반제 양키 고홈” “노동자의 철천지 원수 미국놈들 몰아내자”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 고홈” “미일외세 몰아내고 민중정권 수립하자”와 “외세압력 물리치고 민족자존 수호하자!(민통련), “군사독재 조종하고 수입 개방 압력으로 민중생활 파탄시키는 미제국주의 몰아내자!(인노련), “군사독재 앞장세워 광주민중 학살하고, 노동자 민중 피땀 짜는 미국놈을 몰아내자”(서노련․인노련), “광주학살의 교사범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이원집정제 강요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불황 실업 강요하는 미일자본 물러가라! 핵기지 철수하고 작전지휘권 이양하라!(자민투․서노련․인노련) 등이었다.

 

넷째, 노동자는 농산물 개방 반대를 주장했다. 이것은 개방과 이농정책의 고통 때문에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소의 배를 칼로 찌르고 농약을 먹고 죽는”농민에게 연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구속된 시위자 일부는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이들에게 주먹 야구방망이 당구봉 등으로 폭행, 통닭구이, 물고문, 전자봉을 이용한 전기고문, 헤드럭, 성고문 등의 수법으로 고문해 구속자들에게 경찰이 미리 짠 각본에 따라 허위 자백하도록 강요했다. 신민당 개헌추진본부의 [인천사태(고문)보고서(1)]는 인천교도소에 수감된 구속자들의 고문 실태를 조사 보고했다.

 

-      7월 부천경찰서에 의한 권인숙 성고문사건 발생

수배자를 찾는 과정에서 부천경찰서가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을 연행했다. 권인숙은 1년 전 부천의 주식회사 성신에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취업했으나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부천서에 연행됐다. 부천서에서 문귀동이 권인숙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성고문 했다. 이것은 공권력을 동원한 탄압이 자초한 것으로 권력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함께 6월민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      53운동 이후 선진노동자의 조직은 PD계는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과 삼민동맹*, NL계는 인천부천노동자회(88 2)의 비공개 조직으로 분화했다.

-      이들은 다시 해고자복직협의회(해협), JOC 등의 대중조직과 함께 선진노동자 조직의 협의체인 인천노동운동단체협의회*(88 5) 그리고 이를 전국단위로 조직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를 구성했다.

 

-      이와 함께 노동조합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각성과 힘을 바탕으로 지역조직과 전국 조직을 추진했다. 노조는 노동자 대항쟁 때 파업 농성 시위 등을 경험한 3,700여 노조 가운데 자주성이 강한 민주노조가 나왔다. 이것이 인천지역노조협의회 등 지역노조협의회를 조직하고 모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1990)결성했다

 

1987

-      1987 1 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하다.

-      1987 6 9,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학교앞 시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 7 5일 사망하다.  

 

-      6월 항쟁,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다.

6월 항쟁은 1987 6 10부터 6 29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대통령 전두환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 10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 29 노태우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      6 10, 6 18, 6 27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투쟁이 전개되었고 전국은 혁명 전야의 상황으로 치닫다.

-      6 26,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 시위가 전개되다.

-      이날 인천에서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결성이 선포되었다.

 

-      6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과 언론자유 보장, 국민의 기본권 신장 등의 내용을 포함한 8개 항의 이른바 ‘6.·9선언’을 발표하다.

 

1991-1992

 

-      1991 7, 인민노련, 삼민동맹, 노동계급의 통합에 이어 통합조직에 의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결성. 그러나 한사노당은 훗날 신노선이라 불리는 <진보운동의 신노선>이라는 문서를 발표한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는 역사적 전환기 속에서 합법정당으로 조직을 전환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신노선은 논란 끝에 통과되고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는데, 92년에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민중당 1992 총선에서 참패하고 해산당한다.

-      3 24, 14대 국회의원 선거

-      12, 14대 대통령 선거

 

 

* 유병진, 오경석이 활동한 단체 또는 조직.

Copyright© 2013.
All rights reserved. Modified by Byeong Jin